2010년 8월 25일 수요일

게임개발자 북미취업 가이드 6편: 실제 취업사례 - 다른 사람들

지난 주에는 제 취업사례 -- 사실 거의 인생담이었지만 -- 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번 주에는 제가 제3자의 입장에서 목격했던 다른 분들의 취업사례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객관적이 되겠죠? ^^

한국에서 경력쌓고 캐나다 어학연수 뒤 취업하신 프로그래머 H님
제가 예전에 Blue Castle Games에서 일할 때 렌더링 프로그래머로 취직해오신 한국분이 계셨습니다. H님이라고... 한동안 바로 옆 책상에서 일하시긴 했지만 딱히 친해질 기회는 없었네요. 워낙 조용하신 분이었고 다른 렌더링 프로그래머랑 잘 어울려 놀지도 않으셔서 저하고 친해질 기회는 없었습니다.

이분은 연세대 수학과(94학번이신듯)를 졸업하셨고요. 그 뒤에 한국에서 경력을 한 7년정도 쌓으셨죠.  한국에서 마지막에 몸담으셨던 곳은 웹젠인데 '뮤'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으셨던 거 같고요. 차기작에서 클라이언트 팀장을 하셨답니다. 그 뒤에 캐나다로 어학연수 한 6개월 오셨다가 어학연수동안에 Blue Castle Games에 원서를 넣으셨다죠. 잘 기억나진 않는데 곧바로 면접을 보지는 못하셨고, 한국에 돌아가신 뒤에야 연락와서 면접받고 취업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비자는 Blue Castle Games에서 취업비자 스폰서를 해줬다는군요.

직급은 시니어 프로그래머 급은 아니였고요, 한 중급(intermediate)정도였던 듯 합니다. 북미 경력으로 치면 한 3~4년 쳐주지 않았나 싶네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한국에서 쌓는 경력은 북미에 비해 좀 실력향상이 더디더라구요.)

모범적인 케이스죠? 한국의 경력을 기반으로 실력보여주고 면접으로 실력인정받아서 해외취업한 케이스. 심지어는 회사에서 취업비자 스폰서까지 해줬으니까요. 이 분 이제 해외 경력만도 한 4년 넘게 되니까 이민을 하셨거나 준비중이지 않을까 싶네요. ^^

VFS에서 3D모델링 공부 뒤 취업하신 H님
어라? 또 H 님이네요. 당연히 다른 분이십니다. 이 분은 제가 예전에 KoolHaus Games에 다닐 때 만났던 분인데요. 사실 한국에서 뭐 하셨던 분인지는 잘 모릅니다. 한국에서 특별한 경력이 없었던 걸로 알고 있고요. 캐나다로 유학와서 Vancouver Film School 하고 Capilano 대학에서 3D 모델링과 애니메이션을 총 2년 공부하신 뒤에 포트폴리오 잘 만들어서 위 게임회사 취직한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한 6개월 뒤엔가 다른 애니메이션 회사로 가신 분입니다. 현재는 Rainmaker라는 꽤 유명한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리드(팀장)을 하신다는군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아티스트들은 포트폴리오 하나면 끝입니다. 프로그래머보다 실력을 증명하기가 정말 쉽지요. 이분 포트폴리오는 제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3D모델링 실력은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신기술이었던 ZBrush도 잘 다뤘지요. 아마 그런 부분들이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분에 대해 인상깊었던 점이 두가지 있는데요. 첫번째는 이 분 영어 참 못하셨다는 겁니다. -_-;;;  한 번은 세들어 살던 집주인하고 뭔가 분쟁이 있었던 거 같은데, 정식으로 서류제출한다면서 영어로 편지쓴 것을 회사 사람들에게 한 번 보여줬었죠. 회사사람들 이 편지 읽고나서 대체 뭔소린지 이해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는.....-_-;;  이정도로 영어못해도 실력 좋으면 취업된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였죠.

두번째로 인상 깊었던 점은 이 분 꽤나 캐나다 문화에 잘 적응하셨다는 겁니다. 그 당시 캐나다인 여자친구도 있었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학벌이니 나이에 따라 계층을 두는 거를 참 싫어하셨던 거 같더군요. 한 서너달 같이 일한 뒤에 저한테 한말씀 하시는게 제가 맘에 들었던 점이 다른 한국인하고 다르게 처음보자마자 "한국 이름이 뭐냐?", "나이가 몇살이냐?", "학교 어디나왔냐?" 이런 질문 안했다는 거라더군요. (사실 처음 보자마자 이런 질문 하는거 참 에티켓 없는 짓 같아요.)

이 분 비자문제는 저 위에서 소개드렸던 프로그래머 H님과는 다르게 취업비자가 아니라 회사보조 BC주 특별이민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6개월만에 캐나다 영주권 따셨을껄요?

어쨌든 아티스트들은 실력만 있으면 취업은 매우 쉬워집니다. ^^

고졸로 한국 경력 6년 후에  EA에 취직하신 프로그래머 M님
이 분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하신 뒤 곧바로 현업에서 경력 쌓으신 뒤에 EA에서 지원해서 전화면접만 보고 취업되신 분이십니다. 예전부터 FIFA 축구게임 만드는게 꿈이었다고 하셨는데 현재 FIFA 게임의 게임플레이를 담당하고 있다고 들었지요. ^^ 자신만의 운영체제를 만들어보려고 이리저리 쑤셔도 보신 분이시고, 한국에서 게임개발 관련 서적도 한 권 다른분들과 공동집필하셨더라고요.

제가 같이 일해본 경험은 없어서 실력이 어느정도신지는 모르겠지만 실력은 둘째하고서라도 운영체제 만들려고 시도해보고, 책도 저술하실 정도면 얼마나 열심히 사신 분인지 딱 보이시죠? 저한테 한번 자신은 고졸인게 컴플렉스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있는데 그런거 상관없이 실력만으로 취직이 된다는 거 보여주시는 참 좋은 예입니다. ^^

예전에 영어를 너무나 못하셔서 호텔에서 체크아웃할 때 엄청 고생하셨다고 소개드린 분이 계셨죠? 바로 이분입니다. 그래도 실력 인정받아서 취업하셨고, 처음 봉급도 한 7~8만불 받으셨으니까 한 경력 4년정도는 인정받으신듯. ^^

<Y님 이야긴 본인 요청에 따라 삭제했습니다. 그 대신 제 책을 보고 힘을 얻으셔서(?) 해외취직 성공하신 분들의 사례를 책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위의 사례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한국에서 경력이 있으신 분들이 그나마 쉽게 취업을 합니다. 따라서 제가 추천해드리는 방법도 한국에서 경력을 쌓으신 뒤, 북미쪽으로 취업하시라는 것이지요. 물론 경력없이도 실력이 매우 뛰어나신 분들은 무경력으로도 잘 취직할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보통 자기가 잘났다고 하시는 분들 중에 한 10프로 정도만이 정말 잘나셨더군요.  (90프로는 그냥 현실감각 없으신 분들이에요 -_-;;;) 본인이 그런 케이스가 아닌지 한 번 잘 생각해보시고 가능하면 장기적으로 길게 보시고 차근차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p.s. 위에 다른 한국분들의 사례를 들면서 생각해보니 사실 저 분들중에 연락하고 지내시는 분이 하나도 없네요. 원래부터 인간 사귀는 폭도 그리 넓지 않고, 정말 친해지고 잘 맞으면 아주 친한 친구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대충 어울리지를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소개드렸던 아티스트 H님의 말처럼 나이나 출신 따지는 분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요.  ^^ (한국 분들 좀 그렇더라고요. 서로 한국출신이니 반드시 친구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  저는 그냥 인종/국적 상관없이 서로 잘 맞는 사람하고만 친구먹는 성격이랄까요.

p.s.2. 글 즐겁게 보셨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겠다 싶으시면 View On(Daum)이나 좀 눌러주세요. ^^


2010년 8월 18일 수요일

게임개발자 북미취업 가이드 5편: 실제 취업사례 - 포프


사실 북미취업 가이드의 핵심적인 내용들은 '제4편: 실전가이드'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냥 이론만 주루룩 늘어놓는 것보단 실제사례를 통해서 배우시는 분들이 꽤 되시므로 이번 주와 다음주를 통해 제 취업사례와 다른 분들의 취업사례를 늘어놓으려 합니다. (제 취업사례는 무지 주관적이고 다른 분들의 취업사례는 객관적이 될듯요.)

사실 한국에서 평생살꺼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렇게 캐나다까지 건너와서 게임개발을 하게 된 사연(?)을 공개하는 것, 상당히 주저스러웠습니다. 제 삶에서 지난 20년 간의 이야기를 이렇게 한번에 정리해서 올리는 것이 처음인데 제 과거중에 상당히 부끄러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이젠 한국을 등지고 사는 제 모습을 곱지 않게 보실 분도 계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제 이야기를 통해 제정신 차리시는 분들이 한분이라도 있길 바라며 제 숨겨진 이야기를 여기에 올립니다.

현재 포프의 상태 - 북미경력 6년차의 그래픽스 프로그래머
일단 현재 게임프로그래머서의 제 상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군요.
  • 현재 Relic Entertainment스페이스마린 팀에서 렌더링 프로그래머로 재직중입니다.
  • 북미 경력 6년, 한국경력 포함 대략 10년입니다.
  • 내년쯤에 Senior Graphics Programmer 타이틀을 달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Senior 바로 아래 직급)
  • 한달에 한 번씩은 세계 유수의 게임개발회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습니다. (오늘도 Ubisoft에서 전화왔었습니다.)
현재 문화적으로는 솔직히 한국인이라고 하기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 영어가 주(primary) 언어입니다. 생각도 영어로 하고 꿈도 영어로 꾸는 상태가 되었죠. 북미가이드 쓸 내용을 일주일내내 전철타고 출근하면서 노트에 끄적이는데 그 끄적이는 것조차 영어로 합니다. 한국말은 일주일에 한번 부모님하고 통화할 때 하는게 전부입니다. (한글 트위터 및 블로그 연 뒤로는 오히려 좀 더 자주합니다만 아직도 영어가 조금 더 편합니다. 영어로 먼저 생각한뒤 한글로 번역하는 수준이랄까요.)
  • 친구도 대부분 캐나다인고 한국친구는 1명밖에 없습니다. 저란 인간 알고보니 캐나다인들하고 문화적으로 더 잘 맞더군요. 캐나다인이 좀 더 사생활 존중도 잘해주고 실용적/논리적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 TV/영화/음악/뉴스 등의 한국 문화 및 소식과는 단절된지 오랩니다.

그럼 제가 어쩌다 이꼴이 되었을까요. 이 모든 스토리는 제가 처음 게임프로그래머 일을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첫 게임개발 시도 - 그리고 실패
제가 게임을 만들 꿈을 꾸기 시작한건 중2 때부터 입니다. 1991년 쯤이죠. 이 당시 게임개발사들은 사실 매우 소규모였습니다. 한 4~5명이 모이면 게임 하나 만들던 때랄까요? 이 당시만해도 "전 컴퓨터 게임 만들거에요."라고 하면 무슨 소린지 이해못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절대 사회적으로 인정 못받는 직업이었지요.

어린 마음에 뭔가 큰 미래를 본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여기에 본능적으로 끌린 것이었을까요? 전 이 때부터 몇몇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만들거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원래부터 프로그래머 체질이었던 저는 게임개발을 하려면 터보C를 해야한다는 말을 듣고는 중3때 C를 독학으로 마칩니다. (매 교시 쉬는시간마다 10분씩 공부했죠.)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 너다섯 명과 게임개발을 시작합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동안 게임디자인/레벨 디자인하고 밤과 주말에 열심히 프로그래밍을 했었죠. 주경야독이랄까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냥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놀이삼아 게임개발을 했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듯 한데.. 그것보다는 조금더 진지했었습니다. 강남역에 사무실(오피스텔)까지 하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여기에 퍼부은 시간도 왠만한 전문 게임개발자 못지 않았습니다.. 주경야독 맞죠? ^^

이렇게 큰 야망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게임을 내놓고 실패한것도 아니고, 1996년 모든 팀원들이 대학 진학한 지 얼마 안되서 내부불화로 팀이 해체 되었습니다. (사실 제 탓이 젤 컸죠. 팀장이고 리드 프로그래머이기까지 했는데 성격이 모나서 저하고 다른 핵심멤버하고 대판 싸우고 해체되었으니까요.)

법학도 - 방황의 시절
팀이 깨졌을 때, 전 이미 연세대 법학과에 재학중이었습니다. 왜 컴퓨터 과를 안갔냐고요? 가고 싶었습니다. 못갔죠. 제가 문과/이과를 선택해야했던 고2초 때까지만 해도 색약(색맹보다 조금 약한 놈. 하지만 사회적으로 여전히 무시받는 놈 ^^.. 그래서 제가 Blind Renderer죠. 색맹은 Colour Blind니까...)은 이과진학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게 가능해 졌을때는 이미 제가 고3이 된 이후였고, 그 때 다시 이과로 전향해서 모든 학업을 따라잡는게 너무 벅차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냥 문과에 머물렀고 결국 법대에 가게 된거죠. 어차피 모든 걸 독학으로 배우는 걸 좋아하는 저에게 무슨 과를 가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게임 만들어서 성공하면 전공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죠. (덕분에 '법대출신 게임프로그래머'라는 멋드러진 타이틀을 달고 다닙니다. 이젠....)

근데 게임 팀이 해체되었습니다..... 많이 힘들었죠. 다른 멤버들은 대부분 공대나 컴퓨터과에 진학했던지라 알아서들 또 다른 팀에 들어가곤 했는데 전 그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법대에서는 게임을 만드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더군요. -_-;;;; 혹시나 하는 맘에 연세대 컴퓨터 동아리에서 맘 맞는 새 멤버들을 찾아볼까 해서 찾아가보기도 했는데.... 그 후진 386 컴퓨터 한대 앞에 학생들 10여명이 우르르 모여서 '오오 신기하다~'라고 감탄하고 있는 꼴을 보곤 그냥 돌아서 나왔습니다. -_-;;;; 그렇게 대학교 초창기를 그냥 아무 의미없이 방황하며 살았죠. 그냥 힘들었던 기억만 많이 나고요. 그래서인지 단편 따위의 글도 많이 쓰고 노래도 꽤 만들고/부르고 그랬었네요.

그래서 그냥 다 잊고 군대나 갈려고 했는데 부모님들이 아들이 두명 다 군대에 가있는 건 쓸쓸하다시면서 형 제대하면 군대 가라고 만류하셔서 그것도 뜻대로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대신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죠.

고시생 - 가족의 캐나다 이민 결정
사법고시 공부... 결국엔 이 것밖에 할 게 없나보다 하고 시작했었죠. 대학교 2학년, 97년이었을거에요. 그리고 법대 동기들이 거의 전부다 하니까 나도 해야하나 보다 따라한 것도 있고요. 나름대로 열심히 한 기간도 있었는데 결국 제가 정말 정열을 가지고 한 일이 아니다보니 계속 실패하더군요. 지금 뒤돌아보면... 나중에 제가 게임프로그래머가 되려고 퍼부은 노력에 비하면 정말 허접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나 하는 말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라'입니다.) 또한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다보니 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불만투성이었고, 성격도 꽤나 드러웠죠... (그 때 제 더러운 성격에 학 때신 분들 ... 혹시 보시고 계시면 미안해요...)

전 이 때만 해도 그냥 전 고시패스하고, 군복무관으로 몇 년 근무하고 나와서 판/검/변호사가 될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97년 초인가에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가겠다고 결정하고 이민서류를 넣었을 때만 해도 좀 놀랐었죠. 부모님들이 혹시나 해서 제 이름까지 포함해서 전가족 이민서류를 넣어 놓긴했지만(아들 2명 넣나 1명 넣나 가격 차이가 별로 없었다는군요), 이 때만 해도 부모님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전 한국에서 고시패스해서 그냥 한국에서 눌러 살거라고 생각했죠. 따라서 이민 허가가 나면 가족들은 캐나다 가서 영주권 취득하고, 전 한국에 남아서 그냥 영주권을 자동포기할 생각이었습니다. 명문대에 다니고 있던 저에게는 확실히 새로운 나라보단 한국에서 사는거 좀 더 편했으니까요. 사실 뒤돌아보면 한국에서 남았으면 확실히 돈을 더 많이 벌었거나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뭐 정서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불안하고 훨씬 덜 행복했을테지만요.

캐나다 이민... 이거 사실 1년안에 끝났어야 정상이었습니다. 98년이면 가족들이 절 버리고(?) 캐나다로 갈 예정이었지요. 근데 IMF가 터집니다..... 캐나다에서 이민수속 처리도 잘 안해줬죠.

캐나다 영주권 취득, 대학졸업 그리고 영구이민
결국 이민허가는 99년에 났고 가족들은 2000년 4월에 캐나다 이민을 갑니다. 전 이미 정신이 피폐할때로 피폐해 진 고시생이었고, 2001년 2월 졸업 예정이었죠. 제가 2000년 11월말까지 캐나다 입국안하면 영주권이 자동포기가 되는 상황이었는데, 가족도 한번 볼 겸 영주권도 그냥 받아둘 겸(어차피 포기하는 건 쉬우니까요.) 2000년 11월초에 캐나다로 와서 영주권을 땄습니다. 그리고 1주일만에 다시 한국에 나왔죠. 학교 졸업도 해야했고 사법고시도 봐야했으니까요. 당연히 그 해 사법고시 실패했고요. 2001년도엔 그냥 가족들과 있으면서 공부할 생각으로 캐나다에서 반 년 넘게 있었습니다. 

근데 이때부터 캐나다 문화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돈과 학벌과 사회적 지위로 한 인간의 모든 걸 판단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도 점차 맘에 들었던 것 같고요. 그러면서 제가 정말 좋아했지만 한 번의 실패에 상처받아서 그냥 포기해버렸던 게임제작에 대한 꿈이 얼마나 소중한지 점점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법고시 한 번만 더 시도하고 안되면 다 때려치고 캐나다 들어와서 새출발 해보겠다고... 전 이 당시만해도 아버지가 절 집에서 내쫓을 거라고 생각을 했기에 접시닦이를 하던 뭘하던 어떻게든 입에 풀칠하고 살아가면서 결국엔 게임개발자가 될 거라고 다짐을 했답니다.

그리고 2002년, 하늘의 뜻대로 사법고시 실패... 그리고 전 캐나다로 영구이민합니다. 2002년 3월이었습니다.

영어 공포증, 하지만 번역가 인생
부모님께 더이상 사법고시 공부안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전 집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러진 않으시더군요. 그래도 더 이상 부모님께 손벌리는 것이 죄송스러워서 돈 벌 궁리를 했습니다. 접시닦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번역 일을 해볼 순 있겠더군요.

솔직히 저 영어라면 담쌓고 살았었습니다. 대학교 신입생때도 영어로 발표준비해오라는 영어강사님에게 싫다고 대들었다가 쫓겨날 정도였고요. 심지어는 캐나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기초 영어학교에 들어가는 것조차 실력부족으로 거절당할 정도였었죠. (사실, 처음에 지원하러 갔을 때 제 실력 테스트 하려고 면접관이 질문을 하는데 질문이 '내일 뭐할꺼냐? What will you do tomorrow?'였죠. 듣긴 들었는데 쫄아서 한 마디도 안나오더군요. 그래서 거부당했습니다 -_-;  저 이 정도로 영어 공포증을 가지고 있던 인간입니다...(한숨...) 그런데도 이런 제가 번역을 할 생각은 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영어는 개뿔이지만 한글 글쓰기엔 자신이 있었습니다.(단편소설따위 썼으니까요.)
  • 영어 개뿔문제는 그냥 영한사전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시간이 걸려도 사전 뒤질 각오되어있었습니다. 이내력과의 싸움.)
  • 캐나다 이민자라면 출판사에서 별 생각없이 확인조차 번역일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번역을 하겠다고 할 때, 저희 형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비웃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짓 하지 말라고... 전 그래도 가능할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원래 입장바꿔 놓고 생각하는 거 잘합니다. 제가 출판사 사장이라도 '나 캐나다 이민자요'라고 하는 오는 인간 넙죽 받아줄거 같더라구요.) 그래서 무조건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번역일을 받았고 그때부터 주로 컴퓨터 서적 및 게임개발 서적들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번역한 책보고 게임개발 공부하신 분들 은근히 꽤 계실 겁니다. Programming RPG Games with DirectX... 많이들 보셨죠? 그 외에도 게임아카데미하고도 일했고, 코리아 헤럴드 통번역 센터를 통해서 정말 많은 번역일을 했습니다. 가마수트라 기사들도 번역 좀 했죠. 그 와중에 갈렉산드리아도 열었고요.

사실 번역일을 하려고 했던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게임개발 서적을 번역하면서 96년이후부터 손놓아버려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버린 제 게임프로그래밍 실력을 다시 늘려볼 심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 나는대로 저 스스로 게임프로그래밍 공부를 한 뒤에 캐나다 게임회사에 지원할 생각이었죠. 그래서 저희 형이 BCIT라는 컴퓨터 쪽으로는 나름대로 평가가 좋은 대학을 가라고 했을때도 '학교에서 배우는 건 하나도 없어. 나 혼자 할꺼야'라고 한마디로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시간이 갈수록 정작 제가 게임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대신에 번역일로 돈 버는 것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저에게 보다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기 위해 저에게 덜 중요한 것들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단편소설 및 시를 쓰는 것도 이 때 어느정도 포기했고(그 때 썼던 글들을 다른 웹사이트에 올리고 있습니다), 음악도 이 때 포기했죠. 그리고 번역, 게임 프로그래밍 공부, 그리고 영어(이미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에만 집중하려고 했죠. 근데 이것 저것 포기했는데도 정작 게임프로그래밍 공부는 뒷전이더군요. 그래서 결국 BCIT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BCIT에서 뭔가 배울 게 있어서 가기로 한게 아니라 1) 학교를 다니면 스케줄 따라 무언가를 해야하니까 어찌되었든 프로그래밍 공부를 할거고, 2) 당장 제 실력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해서 '나 이만큼 실력있소.'라는 걸 보여주면 취업이 조금은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다행히 2년치 학비는 번역으로 어느정도 벌어놨었습니다.

BCIT 생활
BCIT의 CST란 프로그램에 입학했습니다. 2003년 9월이었습니다. 2년짜리 과정인데 여길 들어간 이유는 일단 여기가 제대로 빡세게 가르치기로 악명(?)이 높았고, 4년짜리 대학에 들어가기엔 더이상 낭비할 인생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여기 들어갈 때 목표는 수석졸업이었습니다. 어차피 남들보다 영어도 못하고 캐나다 출신도 아니니 내가 취업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단 걸 보여주는 게 유일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언제나 저 자신에 대한 의문이 생기더군요. 그 이유는:
  • 과연 내가 그 수년간의 공백기간 이후에도 컴퓨터를 잘할 수 있을까?
  • 과연 내가 영어 강의를 이해할 수 있을까?
  • 과연 내가 수석을 할 정도의 실력이 될까?
였습니다.

영어강의...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BCIT 들어오기전에 영어과정에서 영어쓰기와 읽기는 엄청나게 공부해서 A-로 졸업하긴 했지만(역시 빡세게 했습니다 -_-) 역시 듣기/말하기는 참 힘들었습니다. 심지어는 학교친구들하고도 의사소통이 잘 안되었으니까요. 한 몇주간 영어때문에 스트레스 한참 받다가 거의 포기했습니다. 영어 잘하는걸...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제 프로그래밍 실력이 보통사람 이상이었단 겁니다. 그리고 성격적으로 캐나다인들하고 잘 맞다보니, 캐나다 친구들이 절 잘 받아주었고, 결국 캐나다인 3명과 같이 팀을 이뤄 학교 프로젝트 및 과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이 되면 그만큼 돌아오는게 있습니다.). 그리고 팀원들과 거의 밤과 낮을 동고동락할 정도로 학교과제가 빡세었던지라 그렇게 어울리면서 저절로 영어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영어는 포기하면 잘하게 된다.'란 말 들은 적 있었는데 정말 그렇더군요.

정말 주말도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학교 다닐동안에 어디 놀러가거 쉰 기억 거의 없습니다. (한 학기 끝날 때마다 학교 Pub에 가서 술마시고 노는 정도) 그 결과 제가 전공했던 Digital Processing에서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2005년 5월이었습니다.

사기꾼 게임회사 취업, 잠시 방황, 그리고 Dream Came True. Really.
졸업후에 한 3개월간 취업 못하다가 Relic도 떨어지고 KoolHaus라는 악덕회사에 취업을 합니다. 게임개발자가 되려고 하는 졸업생들을 착취해 먹는 회사였죠. 보다보다 못해 5개월만에 때려치고, 다른 게임회사에 당장 취직도 안되서,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래머로 한 3~4개월 일했습니다. 이 때 다닌 회사 꽤 안정적이고 복지도 좋아서 어머님이 좋아하시긴 했는데, 업무가 너무 지루하고 게임을 너무 만들고 싶었기에 어머니 몰래 게임회사에 원서넣고 면접보고 취업을 했습니다. 이 때부터가 제 꿈을 다시 이룬 때죠. 2006년 6월일 겁니다.

이 회사 이름이 Blue Castle Games입니다. EA에서 야구게임 만들던 사람들이 나와서 만든 회사고 전 여기서 Xbox 360, PS3, Wii, PS2, PSP용으로 야구게임 3개(플랫폼 별로 따지면 10개)를 출시했습니다. 사실 이 회사 다니면서 전 다른 일돌다 많이 했습니다. 거의 5가지 일을 동시에 했던듯 한데요(five jobs족?). 1) BCG에서 그래픽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2) AI 대학에서 HLSL 강사를 했고, 3) BCIT에서 Computer Graphics 전공으로 학사과정을 마무리지었고, 4) BCIT에서 CST학생들 채점을 했고 5) 번역도 했습니다. 거의 미친 짓이었죠. -_-;;;

이렇게 여러가지 일을 몰아서 한 이유는 제가 과거에 방황하느라 낭비한 삶을 좀 만회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바쁘게 살았죠. -_-;;; 남들 full-time으로 2년동안 마치는(CST 2년에 2년 추가해서 학사 받습니다) 학사과정을 전 part-time으로 2년에 마쳤으니까요. 이 때 스케줄이 어땠냐하면요....
  • 월요일: 회사 업무. 회사업무 후 BCIT 수업들음
  • 화요일: 회사 업무. 회사업무 후 AI에 가서 강의
  • 수요일: 회사 업무. 회사업무 후 BCIT 과제 
  • 목요일: 회사 업무. 회사업무 후 BCIT 수업들음
  • 목요일: 회사 업무. 회사업무 후 BCIT 과제
  • 금요일: 회사 업무. 회사업무 후 BCIT 과제
  • 토요일: BCIT 수업들음. BCIT 채점. 번역
  • 일요일: BCIT 채점. AI 수업준비. 번역
정말 미쳤었죠 -_-;

그리고 AI에서도 학생들이 언제나 최고강사로 칭해줬고, 아직까지도 학생들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면 저에게 정말 고맙다고 술사주고 그럴 정도입니다. 뭐든 열심히 했죠. 고시생 시절하고 비교하면 정말... 그때가 부끄러울 정도죠. 

(이제 제가 왜 싱글인지 아시겠죠? ^^)

그리고 현재
그리고 2008년 5월에 전 Relic으로 옮겼고.. 아직까지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9년 12월을 끝으로 좀더 게임 프로그래밍에 전념할려고 AI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BCIT에서 채점하는 것도 관뒀습니다. 번역도 관둔지 꽤 되었죠.

그럼 다시한번 제 현재상태가 어떤지 볼까요?
  • 현재 Relic Entertainment의 스페이스마린 팀에서 렌더링 프로그래머로 재직중입니다.
  • 북미 경력 6년, 한국경력 포함 대략 10년입니다.
  • 내년쯤에 Senior Graphics Programmer 타이틀을 달 가능성이 높습니다.
  • 한달에 한 번씩은 세계 유수의 게임개발회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습니다. (오늘도 Ubisoft에서 전화왔었습니다.)
(그냥 복사해서 붙였습니다 -_-)

지난 15년간을 돌아보면... 
  • 한 5~6년 쓸데없이 방황했습니다. 괜히 남 탓, 세상탓을 했었습니다. 사실 제가 실패가 두려워서 그랬을 뿐인데요. 그래도 그 때의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됩니다. 그 뒤로 다시는 그렇게 인생 낭비하지 않으려고 매일매일 최선을 다했습니다.
  • 게임프로그래머가 다시 되려고 마음먹고 노력할 때는 정말 제가 즐겼지만 제 꿈보다는 덜 중요했던 것들(음악, 글쓰기 등) 다 포기하고 이짓만 했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즐기면서 자신을 꿈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건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 제가 할 수 있는 것 다 이루고도(수석졸업) 게임 프로그래머로 취직하는 거 쉽지 않았습니다.
  • 주변에서 '넌 안돼'라고 말하는 사람 꽤 많았습니다. 그래도 '난 돼'라는 거 보여주기 위해 더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찾기위해 노력했습니다.
  • 운이란 건 확실히 없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준비가 되어있기 위해서 빡세게 노력하는 것만이 성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그리고 지금은 확실히 행복합니다.



p.s. 매우 주관적/감정적인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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